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지아 (문단 편집) === 평가 === 동시대에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처럼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이긴 반면[* 비록 실질적으로 전쟁을 끝낸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유리한 입장을 차지했으나 정작 프로이센에게 주요 공업지역이던 슐레지엔을 상실함으로써 유의미한 경제적, 영토적 손실을 수반함으로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7년 전쟁은 질 수 없는 싸움[* 시동생 샤를 알렉상드르가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에서 박살나고 사임하면서 한 말이다. 훗날 장조카 요제프 2세 때 삼촌이자 이모부를 다시 등용하려 했지만 결단코 사양했다. 오스트리아는 카를 6세 시절 [[사부아 공자 외젠]]을 명장이라고 은퇴도 못하게 한 전력이 있다.]을 운빨로 날려먹었다.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했지만 '불순 사상', 즉,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조짐을 보고 보수 정책으로 회귀하게 된다. 뛰어난 능력과 달리 즉위 초반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임신-출산으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부부간 금슬이 나빴거나 손이 귀해 자식이 적었다면 임신으로 인한 리스크는 경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군주제에서 대를 이을 후손의 생산은 군주들에게 있어서 성별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이므로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자 후손이 없어서 여자의 몸으로 왕관을 쓰게 되어 승계 문제 때문에 전쟁까지 치른 입장이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부부간 금슬도 너무 좋았고 본인이 처했던 경험때문에 자식욕이 남들보다는 높았을 테니 슬하에 자식이 많은 건 당연했다. 다만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출산 기간이 주는 신체적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성 통치자로서 다산은 국정에 전념하기에 불리하다.] 직접 전쟁에 참가해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에 맞서기에는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해 타고난 의지력과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낸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덤으로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되찾아왔으며, [[카를 6세]] 시기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냈다. 게다가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등 다산하여 가문의 후사 역시 공고히 하였기에 능력 있는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썼던 [[카를 5세]][* 카를 5세는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개인적 고향과 성향은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잊지 않았던 [[겐트]] 출신의 [[네덜란드인]]이고, 군사적 기반은 [[스페인]]이며, 활동 중심지는 [[이탈리아 반도]]로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군주일 뿐, 진정한 의미의 오스트리아의 군주로 치기는 어렵다. 카를 5세의 넒은 영지들 중에서 이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카스티야 왕국]], [[밀라노 공국]] 같은 핵심적인 영지의 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카를 5세는 1521년에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물려주면서 오스트리아 대공 작위는 형식상으로만 달고 있었다.], [[쉴레이만 1세|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1차 빈 공방전|빈을 수호]]하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을 출범시킨 [[페르디난트 1세]], [[9년 전쟁|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대튀르크 전쟁|헝가리 전역을 수복한]] [[레오폴트 1세]] 등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오스트리아 군주 중 한 명이다. 그녀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형식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1781년 1월 6일 추모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영예를 남겼으며, 자신은 그녀와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프리드리히 2세도 그녀의 치세나 능력에 대해선 나쁘지 않게 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두 차례의 큰 전쟁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참고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른다고 프리드리히 2세가 먼저 전쟁을 일으킨 거고, 7년 전쟁은 마리아가 프로이센을 외교적으로 압박해나가기는 했지만 전쟁은 프로이센이 작센을 기습공격하면서 시작했다.]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오스트리아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 전비는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이었으며, 만약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재력이 아니었다면 오스트리아는 이때 망국의 길로 빠질 가능성도 있었다.] 본인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역사적 흐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상기한 두 전쟁과 아들 [[요제프 2세]]가 주도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을 거치며 동부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영향력을 확보한 대신 장기적으로는 서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향력을 잃기도 했다. 이미 [[베스트팔렌 조약]] 때부터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겪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대에 [[실레시아|슐레지엔]]을 잃고 [[프로이센 왕국]]이 성장하면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별도로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이 완성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유명무실화는 심화되었다. 서쪽의 영토가 [[게르만족|민족적으로 근연]]하였던 것에 비하여 동쪽의 영토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여 [[민족주의]]의 도래 이후 [[사라예보 사건|폭탄이 되어버렸음]]을 고려한다면 아쉬운 점이다. 또한 본인부터가 순종과는 거리가 일만 광년 떨어진 제왕적인 군주임에도 [[정략결혼]]을 보낸 딸들에게는 [[내로남불|"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해서]] [[마리아 아말리아|딸의 반감을 자극]]했다. [[제2차 빈 공방전|100여년 전 자국을 멸망 위기에서 구해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전통적인 동맹국]]을 [[폴란드 분할|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멸망시키는 등]]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는 정반대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쇤부른 궁전]]을 건축했던 모습 역시 비판받으나 실제로는 [[레오폴트 1세]] 시절부터 추진했던 계획이었던 점, 떨어진 위신을 회복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 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요제프 2세|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마리아 크리스티나(오스트리아)|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흠이었다. 이렇듯 평가가 갈리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았던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 느슨한 동군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뭉치게 되었다. '통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8세기까지도 중세적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던 합스부르크 왕가 산하 국가들의 후진적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정비했으며, 그녀의 대에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게 된다. 살아생전 이미 '국모'[* 동아시아에서 흔히 왕비를 국모라 부르는 것과 달리 업적에 대한 평가다.]로 불릴 정도였고, 그녀의 사후에도 오스트리아의 기본 정책 방향은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을 고수하며 오랜 안정을 유지했으며 후계자와 신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